19세기 중엽,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였던 청나라가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급격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아편 전쟁은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동아시아 전체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문서는 청나라의 전성기부터 몰락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고, 그것이 동아시아 세력 구도에 미친 깊은 영향을 살펴봅니다.
18세기 청나라의 전성기와 내적 문제
강희제(1661-1722), 옹정제(1722-1735), 건륭제(1735-1796) 시기의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대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이 시기 청나라는 몽골, 신장, 티베트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사상 최대의 판도를 구축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사고전서》 편찬과 같은 대규모 학술 사업이 진행되어 중화 문명의 절정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 번영 뒤에는 심각한 내적 모순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18세기 후반부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1억 명에서 3억 명으로 늘어났지만, 경작지는 그에 비례하여 확대되지 못했습니다. 이로 인해 토지 부족과 농민 빈곤이 심화되었고, 사회적 불안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건륭제 후기에 등장한 관리 헤셴(和珅, 1750-1799)의 부정부패는 청나라 쇠퇴의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헤셴은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20여 년간 권력을 독점하면서 천문학적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당시 국가 재정 15년치에 해당할 정도였으며, 이러한 부패는 관료 체계 전반에 만연하여 국정 운영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렸습니다.

강희제와 건륭제 시기 청나라의 전성기

강희제 시대 (1661-1722)
삼번의 난 평정, 타이완 정복,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옹정제 시대 (1722-1735)
행정 개혁 단행, 조세 제도 정비, 관료제 효율성 제고
건륭제 시대 (1735-1796)
영토 확장 완성, 문화 사업 추진, 그러나 후기 부패 심화
영국과의 무역 불균형과 아편 밀수의 시작
18세기 중엽부터 영국은 중국의 차(茶), 비단, 도자기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특히 차는 영국 사회의 필수품이 되었지만, 중국은 영국이 제공할 수 있는 상품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영국은 지속적인 무역 적자에 시달렸고, 중국으로 은이 대량 유출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영국의 딜레마
중국 상품에 대한 높은 수요
영국 상품에 대한 중국의 낮은 관심
지속적인 은 유출
해결책 모색
인도산 아편의 대안으로 부상
동인도회사의 적극적 개입
밀수 네트워크 구축
아편 무역 확산
중국 내 아편 중독자 급증
청 정부의 경계심 증대
사회 문제로 대두
영국 동인도회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에 주목했습니다. 아편은 중독성이 강한 마약이었지만, 중국에서 높은 수요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1773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편 밀수는 영국의 무역 적자 해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820년대에는 연간 아편 수입량이 5,000상자에서 1830년대에는 20,000상자로 급증했습니다.
아편 밀수의 확산은 중국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했습니다. 아편 중독자가 급격히 증가했고, 이는 사회 질서 유지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또한 아편 구입을 위해 은이 대량 유출되면서 청나라의 통화 시스템에도 악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청 정부는 1839년 임칙서(林則徐)를 흠차대신으로 파견하여 아편 단속을 강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아편은 독이며, 그 해독은 뱀과 전갈보다 더하다. 이것을 금하지 않으면 수십 년 후 중국에는 군사로 쓸 만한 사람이 없고, 국가 재정으로 쓸 은도 없을 것이다."
- 임칙서의 상소문 중
제1차 아편 전쟁(1839~1842): 청나라의 패배와 난징조약 체결
1839년 3월,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강력한 아편 단속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영국 상인들에게 보관 중인 아편 20,000여 상자를 몰수하고 이를 석회와 함께 바다에 폐기시켰습니다. 이 조치는 영국 정부에게 전쟁의 구실을 제공했고, 1839년 11월 제1차 아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군의 우세
최신 증기선과 화기로 무장
효과적인 해상 봉쇄 작전
기동성 있는 전술 운용
청군의 열세
구식 무기와 전술 의존
해상 방어력 부재
내부 지휘 체계 혼란


전쟁 초기부터 청나라군은 영국군의 압도적 화력과 기술력에 무력화되었습니다. 영국 해군의 철제 증기선들은 청나라의 목제 전함들을 쉽게 격파했고, 정밀한 대포는 청군의 구식 화포를 압도했습니다. 1841년 1월 천비지전(穿鼻之戰)에서 청군이 대패한 후, 영국군은 주요 항구들을 차례로 점령해나갔습니다.
1842년 6월 영국군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에 접근하자, 청 정부는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8월 29일 체결된 난징조약은 중국 근대사의 첫 번째 불평등조약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홍콩 할양
홍콩을 영국에 영구 할양하여 영국의 극동 거점 확보
5개 항구 개방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개항 및 영사관 설치
거액 배상금
2,100만 달러(은 약 6백만 냥) 배상금 지불
치외법권 인정
영국인의 중국 내 법적 특권 보장
관세 자주권 상실
수입 관세를 5%로 고정하여 청의 경제 주권 제한
난징조약의 체결은 청나라의 전통적인 중화질서 붕괴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서구 열강들은 이를 기점으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침투를 본격화했고, 청나라는 주권국가로서의 지위를 점차 잃어가게 되었습니다.
제2차 아편 전쟁(1856~1860)과 서구 열강의 침략 심화
제1차 아편 전쟁 이후에도 중국과 서구 열강 간의 갈등은 지속되었습니다. 1856년 애로호 사건을 계기로 제2차 아편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번에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도 연합군으로 참전하여 청나라에 대한 압박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1856년
애로호 사건 발생
영국의 전쟁 명분 확보
1857년
영-프 연합군 형성
광저우 점령
1858년
톈진조약 체결
추가 개항 조치
1860년
베이징 점령
원명원 파괴
1860년 10월 영-프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은 청나라 역사상 가장 굴욕적인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원명원(圓明園) 약탈과 파괴는 중국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원명원은 청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150여 년에 걸쳐 건설된 동양 예술의 결정체였습니다.


파괴 전 원명원의 모습
영국군 총사령관 엘긴 경은 청 정부의 협상 태도에 분노하여 원명원을 완전히 파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3일간 계속된 방화로 원명원의 주요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고,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들이 약탈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서구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연합군의 베이징 점령은 청 정부로 하여금 더욱 굴욕적인 조건의 조약 체결을 강요받게 했습니다. 1860년 10월 체결된 베이징조약은 기존 불평등조약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선교 자유 허용
기독교 선교사의 중국 내지 자유 전도 허용
추가 개항
톈진, 뉴좡, 덩저우, 타이완, 단슈이, 차오저우, 진강, 하네이, 난징 개항
배상금 증액
영국에 800만 냥, 프랑스에 800만 냥 추가 배상
제2차 아편 전쟁의 결과로 청나라의 국제적 위상은 더욱 추락했습니다. 서구 열강들은 이제 중국을 완전히 종속적인 반식민지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문호개방정책'과 '세력균형정책'을 통해 중국을 분할 통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청나라 내부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반란
아편 전쟁의 충격과 패배는 청나라 내부의 잠재되어 있던 모순들을 일시에 폭발시켰습니다. 19세기 중엽부터 청나라는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특히 토지 문제와 인구 압박, 관료 부패가 결합되어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농민 반란이 연이어 발생했습니다.
인구 급증
18-19세기 인구 3배 증가
경작지 부족 심화
토지 집중
대지주의 토지 독점
소농민의 몰락
관료 부패
세금 징수 과정의 부정
민원 처리 지연
사회 불안
민심 이반 확산
반정부 세력 결집

가장 대표적인 반란은 1850년부터 1864년까지 지속된 태평천국 운동이었습니다. 홍수전(洪秀全)이 이끈 이 운동은 기독교적 색채를 띤 농민 반란으로 시작되어, 최대 18개 성에 걸쳐 영향을 미쳤습니다. 태평천국군은 한때 난징을 점령하고 천경(天京)으로 개칭하며 14년간 청 정부와 대항했습니다.
주요 농민 반란들
- 백련교도 난 (1796-1804): 후베이, 쓰촨, 산시 지역
- 태평천국 운동 (1850-1864): 남부 중국 전역
- 염군 기의 (1853-1868): 화북 평원 일대
- 회군 기의 (1862-1873): 신장, 간쑤 지역

이러한 대규모 반란들은 청나라의 군사력과 행정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습니다. 중앙 정부는 반란 진압을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해야 했고, 이는 국가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또한 반란 진압 과정에서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한족 지방 관료들이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면서 중앙 집권 체제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태평천국의 난은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청나라 체제 전반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들이 제시한 사회 개혁안은 전통적인 유교 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시기 지방 세력의 급속한 성장입니다. 태평천국 진압을 위해 조직된 상군(湘軍)과 회군(淮軍) 등은 중앙군을 대신하여 국가 방위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이는 청나라 후기 '동치중흥' 시기의 지방분권화 경향을 가속화시켰고, 결국 청 왕조의 통제력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동아시아 세력 구도의 변화: 조선과 일본의 대응
청나라의 쇠퇴는 동아시아 전체의 정치적 균형에 결정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수 세기 동안 중화질서의 중심이었던 청나라의 위상 실추는 주변국들로 하여금 새로운 대응 전략을 모색하게 했습니다. 특히 조선과 일본의 서로 다른 대응 방식은 이후 두 나라의 운명을 크게 좌우했습니다.

조선의 대응: 정보 부족과 현실 인식 오류
조선은 청나라의 급격한 쇠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인 사대관계에 익숙했던 조선의 지배층은 여전히 청나라를 상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서구 열강의 침입을 일시적 현상으로 여겼습니다. 조선이 입수한 정보는 주로 청나라를 통해 걸러진 것이었기 때문에, 서구 문명의 실체와 위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정보 부족은 조선의 대외 정책에 치명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이런 현실 인식의 한계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 신미양요 등을 경험하면서도 근본적인 정책 전환을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대응: 적극적 정보 수집과 근대화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를 통한 난학(蘭學) 전통 덕분에 서구 정보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1853년 페리 제독의 내항 이후 일본은 서구 문명의 위력을 직접 체험했고, 이를 통해 청나라의 쇠퇴가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은 이러한 현실 인식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일본은 '후크오쿠강병(富國强兵)' 정책을 통해 서구식 근대화를 적극 추진했습니다. 특히 사쓰마번과 조슈번 출신의 개혁파들은 전통적인 사무라이 체제를 혁파하고 서구식 군제와 교육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조선 후기 전통 궁궐의 모습
두 나라의 이러한 대조적 대응은 1870년대부터 구체적인 결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을 개항시키며 동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나섰고,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권국으로 부상했습니다.
청나라의 몰락은 전통적인 중화질서의 붕괴를 의미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유지되어온 조공 체제가 무너지면서, 동아시아 각국은 새로운 국제 질서 속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정보 수집 능력과 현실 인식의 정확성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강화도조약
일본의 조선 개항 강요
청일전쟁
일본의 청나라 격파
한일합병
조선의 국권 상실
아편 전쟁 이후 청나라의 근대화 시도와 한계
제2차 아편 전쟁 패배 후 청나라 지배층은 서구 문명의 위력을 인정하고 제한적이나마 근대화를 시도했습니다. 1861년부터 시작된 양무운동(洋務運動)은 "중체서용(中體西用)" 즉, 중국의 전통 사상과 제도는 유지하면서 서구의 기술만을 도입한다는 원칙 하에 추진되었습니다.
군사 공업 육성 (1860년대)
강남제조총국, 금릉기기국 등 설립
서구식 무기 제조 기술 도입
민간 공업 장려 (1870년대)
상해직포국, 개평광무공사 설립
철도, 전신, 광업 등 근대 산업 육성
해군력 강화 (1880년대)
북양함대, 남양함대 창설
서구식 군함 도입 및 해군 양성
교육 개혁 시도 (1880년대)
동문관, 군국기무처 설치
서구 언어와 과학 기술 교육

양무운동의 주요 인물들은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장지동 등 태평천국 진압에 공을 세운 한족 관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서구의 선진 기술 도입을 통해 청나라의 국력을 회복시키려 노력했습니다. 특히 이홍장은 북양대신으로서 철도 건설, 전신 설치, 근대적 공장 설립 등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양무운동은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정치 제도와 사회 구조의 개혁 없이 기술만을 도입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과거제도와 관료제는 그대로 유지한 채 서구 기술만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근대화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보수 세력의 강력한 저항도 개혁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서태후를 중심으로 한 궁정 보수파들은 서구 문물의 도입을 전통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습니다. 이들은 양무파의 개혁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대했고, 예산 배정과 인사 문제에서 갈등을 빚었습니다.

양무운동의 핵심 인물 이홍장
1885년부터 청나라는 외교 정책의 현대화도 시도했습니다.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설치를 통해 서구식 외교 관례를 수용하고, 만국공법(國際法)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1894년 청일전쟁에서의 참담한 패배로 그 한계가 드러났습니다.
청일전쟁의 충격
1894-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양무운동의 실패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30여 년간 서구 기술을 도입하고 근대식 군대를 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일본에게 완전히 패배했습니다. 특히 황해 대해전에서 북양함대가 전멸한 것은 양무운동의 허상을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청일전쟁 패배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은 청나라에게 더욱 치욕적인 조건을 강요했습니다. 조선의 독립 승인, 타이완과 랴오둥반도 할양, 거액의 배상금 지불 등은 청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더욱 실추시켰습니다. 이로써 양무운동으로 대표되는 청나라의 온건한 근대화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귀결되었습니다.
아편 전쟁이 남긴 역사적 교훈과 현대적 의미
아편 전쟁과 청나라의 몰락이 동아시아 역사에 남긴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특히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의미하는 '중국몽(中國夢)'은 아편 전쟁 이후의 굴욕적 역사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교훈 1: 개방과 쇄국의 딜레마
청나라의 쇄국정책은 결국 서구 열강의 침입을 막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기술과 정보의 격차를 심화시켰습니다. 현대 중국은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개혁개방 정책을 통해 세계 경제와의 적극적 통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교훈 2: 내정 개혁의 중요성
양무운동의 실패는 표면적 기술 도입만으로는 근본적 변화를 이룰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정치 제도, 사회 구조, 교육 시스템의 전면적 개혁 없이는 진정한 근대화가 불가능함을 입증했습니다.
역사적 교훈 3: 국제 질서에 대한 이해
청나라는 변화하는 국제 질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인 중화질서에 안주하면서 서구의 새로운 국제법과 외교 관례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패배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습니다.

현재 중국의 대외 정책에서 나타나는 여러 특징들은 아편 전쟁의 역사적 상처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 설립, 남중국해 문제에 대한 강경한 입장 등은 모두 과거의 굴욕적 경험을 만회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편 전쟁의 현대적 영향
- 중화민족주의의 부상
- 서구에 대한 복합적 인식
- 주권과 영토에 대한 민감성
- 경제 발전을 통한 국력 회복 추구
- 다극화 국제 질서 추구

그러나 역설적으로 아편 전쟁의 역사는 중국에게 세계화의 중요성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19세기 중엽의 쇄국정책이 결국 더 큰 고통을 가져왔다는 인식하에, 현재 중국은 세계 경제와의 긴밀한 통합을 통해 국력 신장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2001년 WTO 가입, 2013년부터의 일대일로 구상 등은 이러한 전략적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아편 전쟁은 중화민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중국이 세계와 소통하고 발전하는 방법을 배우게 한 계기이기도 했다.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평화로운 발전과 호혜적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
- 시진핑, 아편 전쟁 170주년 담화 중
아편 전쟁의 현대적 의미는 단순히 중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강대국 간의 경쟁, 문명 간의 충돌, 경제적 불평등이 야기하는 갈등 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국제 정치의 주제들입니다. 19세기의 경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결론: 아편 전쟁과 청나라 몰락이 동아시아에 남긴 유산
아편 전쟁과 청나라의 몰락은 단순한 한 왕조의 쇠퇴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중화질서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동아시아 각국이 근대 세계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정치적 변화
전통적 조공 체제 해체
서구식 국제법 도입
경제적 변화
자유무역 체제 확산
불평등 조약 확산
사회문화적 변화
서구 문물과 사상 유입
전통 가치관 동요
군사적 변화
서구식 군제 도입
전통 군사력 체계 붕괴
청나라의 몰락 과정에서 드러난 내부 부패와 외세 침략의 결합은 근대 동아시아 역사의 전형적 패턴을 보여주었습니다. 관료 부패, 재정 악화, 사회 불안, 군사력 약화 등 내적 요인들이 서구 열강의 침입이라는 외적 충격과 만나면서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습니다.
청나라 몰락의 복합적 요인들은 서로 상호 작용하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했습니다. 내부 부패는 외침에 대한 대응 능력을 약화시켰고, 외세의 침입은 다시 내부 모순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동아시아 각국의 근대화 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은 결국 일제강점을 경험했고, 일본은 서구식 근대화를 통해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했으며, 중국은 공화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역사 인식 갈등, 영토 분쟁, 경제 경쟁 등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이 시기의 역사적 경험과 연결됩니다. 아편 전쟁과 그 이후의 혼란기가 남긴 상처는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으며, 이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협력을 위해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1840-1860
아편 전쟁과 청나라 주권 상실
1860-1895
양무운동과 근대화 좌절
1895-1912
변법자강과 신해혁명
현재
중국의 부상과 동아시아 질서 재편

결론적으로, 아편 전쟁과 청나라의 몰락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출발점이자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내정 안정과 국제 정세 파악의 중요성, 개방과 자주성의 균형, 그리고 역사 인식의 공유를 통한 지역 평화의 필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과거의 교훈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각국이 상호 이해와 협력을 통해 공동 번영의 길을 모색해 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해시태그: #아편전쟁 #청나라몰락 #동아시아역사 #난징조약 #서구제국주의 #임칙서 #양무운동 #태평천국난 #메이지유신 #중국몽
'역사 이야기 > 세계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결과: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리다 (1) | 2025.10.17 |
|---|---|
| 대공황: 세계 경제를 뒤흔든 검은 목요일 (0) | 2025.10.15 |
| 메이지 유신: 일본의 근대화와 세계 강대국 진출 (1) | 2025.10.14 |
| 빅토리아 시대: 영국 제국의 전성기 (1) | 2025.10.12 |
| 르네상스의 탄생: 어둠에서 빛으로의 여정 (8) | 2025.08.30 |
| 산업 혁명: 인류 생활 방식을 바꾼 기술의 혁신 (8) | 2025.08.29 |